옛날 옛날 50여년 전에 영국에 어떤 용감한 여성이 살고 있었다. 그녀는 비행기 조종사가 되고 싶었지만, 당시에 조종사는 남자만이 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시도 조차 안 했으면 '용감한 여성'이라고 했을리 없다. 그녀는 남장을 하고 남자 목소리를 흉내내어 실제로 비행기 조종사가 됐다. 이 여성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뒤 아이가 4살 정도가 되었을 때였다. 가족이 함께 여행을 다녀오던 길에 아이를 차에서 내리게 한 후 집까지 혼자 찾아오게 했다. 그 이후로도 종종.
이 대단한 어머니의 아들이 바로 버진 그룹(Virgin Group)의 창립자이자 회장, 리처드 브랜슨이다. 난독증 때문에 학교 공부를 따라가지 못하고 고등학교를 중퇴할 당시, 교장 선생님은 아이를 보고 "백만장자가 되거나 감옥에나 갈 것"라고 말했다고 한다. 물론 감옥에도 갔지만 이 아이는 수십 개의 계열사를 거느린 억만장자가 되었다. 지금은 우주 여행 상품을 준비 중이고, 최근에는 불모지라는 해저 개발을 시작했다.
버진은 한국에서는 낯설지만, '미국에 스티브 잡스와 애플이 있다면 영국에는 리처드 브랜슨과 버진이 있다'고 할 정도로 말많고 탈많고 존경받고 독특하고 사랑받는 기업이다. 적어도 책에서 본 버진은 그렇다. 게다가 그의 자서전 중 하나인 <비즈니스 발가벗기기>나 그의 TED talk을 보면 이름 앞에 Sir이 절로 붙어 나오는 존경스러운 기업가다. 바람을 피워서 이혼을 당했다거나, 세금 탈루 혐의 이야기는 마치 거짓말같다.
그래서 늘 궁금했다. 책으로만 배운 브랜드, 특히 말로만 들어도 대단한 버진을 경험하면 어떤 기분일까.
멜번에서 시드니로의 이동을 버진 블루(Virgin Blue)로 선택한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초저가 타이거 에어웨이(Tiger Airways), 국적기인 콴타스(Quantas)에서 운영하는 젯스타(Jetstar)도 있었지만 버진 블루는 '저가'라는 가격 외에 또 다른 특별함을 줄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결과는?
글쎄, 버진의 첫 항공사인 버진 애틀란틱(Virgin Atlantic)이 아닌 Blue였기 때문인지, 내가 기대했던 리처드 브랜슨의 위트는 그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다. 물론 버진 애틀란틱에 그의 위트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른다. 단, '브랜드 기대'라는 것이 있다면 그런 기대가 느껴진다는 것이다. 애플 제품들에서는 스티브 잡스의 편집증이 느껴진다. 그렇지만 버진, 아니 버진 블루에서는 어디에서도 리처드 브랜슨을 느낄 수 없었다.
버진 입장에서는 홈페이지에 버진 블루는 버진 애틀란틱과 다르다고 명시했고, 리처드 브랜슨은 회장일 뿐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나와같이 버진을 접한 소비자들은 대부분 버진하면 그를 떠올린다. 리처드 브랜슨으로 기업을 알리고 아이덴티티를 만들어가고 있는 이상, 이런 실망감에 대해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기업 아이덴티티의 중심에 분명 '위트'가 있다면, 소비자들도 그 브랜드를 경험했을 때 그것을 당연히 느껴야 제대로 된 브랜드라고 할 수 있을테니 말이다.
Southwest Airlines와 같은 fun fun함을 기대한 건 전혀 아니지만, 위트는 커녕 수화물 23kg 기준에서 1kg이 넘었다고 15달러를 더 내라고 하는 건, 아무리 저가 항공이어도 british airways 하고나 어울릴법할만큼 엄격하지 않은가. '난 규정대로 할 뿐이야'라는 눈빛을 보내는 버진 블루의 직원이 보는 앞에서 가방을 열고 책 두권을 버리고 나자, 버진 블루가 그냥 싫어졌는지도 모르겠다.
전날 여행의 여독도 풀지 못하고 두어 시간을 자고 새벽 비행기를 타러 온 고객에게 수모를 안긴 이 항공사의 엄격한 규정대로라면, 보딩 타임에 1분이라도 늦었다가는 날 두고 시드니로 떠날 것 같아서 보딩 타임 전에 게이트 앞에 가 있기도 오랫만이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기대가 남아서 승무원들의 행동거지나 좌석 앞에 꽂힌 잡지들, 인테리어 등도 열심히 보려 했으나, 약간 럭셔리한 저가 항공이라는 것 외에는 뭔가 다름을 느낄 수 없었다.
아무리 '최고의 항공사, 리처드 브랜슨이 이끄는 항공사, 우리는 달라요, 비행에 대한 열정을 보여주려고 열기구를 타고 대서양을 횡단했던 버진이라는 것 알잖아요', 라고 광고를 하면 뭐할까. 결국 진짜 고객은 체크인 데스크에서의 경험으로 그 브랜드를 기억할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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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며칠 후, Virgin Australia 런칭 기사를 보게 됐다. 버진 블루가 버진 오스트레일리아에 흡수 되고, 버진이 오스트리아 대륙에서의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한 모양이다. 어쩌면 난 버진 블루의 레임덕 시기에 버진이라는 브랜드를 처음 경험한 불운을 겪었는지 모른다. 그랬다면 다행일텐데, 그때의 그 경험에서 더 나아지지 않는다면, 앞으로 버진을 좋은 브랜딩 사례로 소개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다행히 지금은 버진의 고향 런던이니, 가능한 많은 버진의 브랜드들을 체험해볼 생각이다. 만나는 영국인들에게도 버진에 대한 생각을 물어봐야겠다. 나의 안 좋았던 첫 경험의 기억이 지워지길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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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미국에서 런던으로 갈 때, 경험한 버진 아틀란틱은 젊고 톡톡 튀는 개성이 인상적인 항공사였어. 대한항공이나 아시아나가 보수적인 고급스러움이라면, 급진적인 고급스러움이랄까. ㅎㅎ
ReplyDelete아, 정말? 나도 그런걸 기대했는데! 궁금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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