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n 4, 2012

[culture] 독후감. 알랭 드 보통.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

런던. 화이트채플 갤러리에서 열린 토마스 스트루스 전의 광고. 그 안의 그의 작품. 뮤지엄 연장 중 하나. 로마 판테옹을 채운 관광객.

1. 토마스 스트루스의 사진과 알랭 드 보통의 글

언젠가부터 갤러리에 가면 걸려있는 사진이나 그림, 때론 설치 작품을 보면서 그 자체의 아름다움보다는 '이 작가는 도대체 왜 이런 작품을 만들었을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물론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것 자체를 누구보다 좋아하지만 사실 아름다움이란 보는 이에 따라 다르고 당시의 시대정신에 따라 달라집니다. 아름답다고 느끼는 작품을 보면 그 앞에 한참을 머물게 되지만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느껴질 때만큼은 아닙니다.

지난 여름, 런던 화이트채플(Whitechaple) 갤러리에 들렀을 때 독일의 사진작가 토마스 스트루스(Thomas Struth)의 전시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그날 토마스 스트루스를 처음 알게 됐지만, 그의 대표작들, 특히 뮤지엄 시리즈를 보며 작가와의 작은 공감대가 만들어졌다고 느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의도에 공감했기에 작품이 알려지고 높은 평가를 받고 있지 않나 합니다.

+그의 작품은 구글 이미지에서도 많이 검색 되지만, 여기 사이트에서 봐도 좋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 알랭 드 보통의 신작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를 읽다가 다시 토마스 스트루스의 사진을 만났습니다. 이 책은 무신론자에게 종교가 어떤 (긍정적) 의미가 있는지, 또한 무신론자에게 종교를 대체할 수 있을 만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그 중 '미술'이 종교를 대신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챕터에서 토마스 스트루스의 뮤지엄 연작(로마 판테온이나 런던 내셔널 갤러리의 유명 작품 앞에서 우르르 몰려가 작품의 제작 연도나 화가의 이름을 확인하는 듯한 관광객을 찍은)을 예로 듭니다. 알랭 드 보통은 '지금의 뮤지엄/갤러리들이 과연 교회/성당/절을 대신할 수 있을까?'에 회의적인 입장을 토마스 스트루스의 사진을 통해 보여줍니다. 그 역시 그와 작은 공감대를 형성했던 모양입니다. 

이 책을 읽기 전, 루브르 박물관에서 '모나리자'를 보는 사람들을 보고 느낀 감정도 이것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과연 루브르 박물관에 들어가기 위해 두어시간 동안 줄을 서서 기다리고는 '모나리자 봤으니 됐어'라며 한 시간도 채 둘러보지 않고 나가는 (저를 포함한) 관광객들에게 박물관은, 또 그 유명 작품들은 무슨 의미가 있는것일까요. 


이런 스치고 지나가는 삶의 의문들, 느끼기는 했지만 말로 표현하지 못한 것들을 알랭 드 보통은 명확하게 활자로 풀어내곤 합니다. 느낌을 논리적 활자화하는 능력, 이것이 알랭 드 보통의 힘입니다. 그가 국내에서는 소설가로 소개되지만 외국에서는 writer보다 philosopher로 소개되는 이유기도 할 것입니다.

이 책에서 개인적으로 울림이 있었던 또 하나의 주장은 '문화가 종교를 대신할 수 있다'입니다. 신을 믿는 절친한 친구들의 집요한 설득에도 불구하고 '일요일의 늦잠을 포기할 수 없다'는 핑계로 교회나 절에 가지 않는 제가 일요일 아침에 갤러리나 영화관, 도서관에 놀러가는 일에는 본능을 거스르면서도 기어이 나가는 기현상을 설명해주니 고마울 따름입니다. 인생의 키워드 중 하나로 '문화'를 꼽는 배경으로도 적당한 주장입니다. 

책에서 말한대로 '우리는 심지어 미술관에서도 가끔 교회에 있을 때처럼 지루함을 느끼지만, 그곳을 나설 때만은 - 딱 꼬집어 말할 수 없지만 이전보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는 기분이' 듭니다. 


2. 맞설 이데올로기도 없는 지금을 사는 아티스트들에게

다시 그림 이야기로 돌아가면, 토마스 스투르스의 사진을 보고 난 후 이 책을 읽으며 어딘가서 읽었던 이 문구가 떠올랐습니다. '아티스트의 본질은 선동가다'. 예술을 위한 예술의 시대, 즉 순수 예술을 선언한 시대 이전에 아티스트의 주요한 역할 중 하나는 선동가였습니다. 선동은 마치 파시스트의 어휘같아서 한 발 물러서게 되는 경향이 있지만, 바로 이것이 제가 예술 작품을 보며 찾고자 하는 '이 작가는 말하고 싶은 바가 무엇일까'에 관한 것입니다.

다니엘 벨은 이미 1960년대에 이데올로기의 종언에 대해서 이야기했지만, 이데올로기의 시대를 겪어보지도 못한 제게 새삼 이제서야 '이데올로기의 시대는 끝났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했는지 알것 같습니다. 현대미술을 보고 해석이 무의미하다라고 하는데, 무조건 비난하기 어려운 이유는 어쩌면 현대미술은 대항마로 세울만한 이데올로기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요. 장 미로는 스페인의 민주화라는, 독일 표현주의자들은 파시즘이라는, 러시아의 이동파는 권위적인 왕궁이라는 적이 있었기에 그들의 작업에 사회적인 의미가 덧입혀졌습니다. (물론 그 전에는 종교라는 엄청난 이데올로기가 있었지요.) 원래 공공의 적이 있을 때 공공들은 똘똘 뭉치고 쉽게 공감하기 마련이니 어쩌면 이데올로기에 시큰둥한 현대인들을 상대해야 하는 현대의 아티스트들을 불리한 감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아티스트들이 선동가가 되어주길 바랍니다. 프로파간다, 이데올로기, 이런 단어들은 듣기만 해도 벌써 무겁습니다. 대신 요즘 movement라는 말이 적당히 가볍고, 무엇이든 가능하게 하는 것 같아 마음에 두고 있습니다. 운동이라고 하면 될텐데, 우리 사회에서의 운동은 또 다시 이데올로기 시대로의 회귀를 의미하는 것 같으니, 그냥 무브먼트라고 하렵니다.

트레이시 에민처럼 작품에 분명한 자기 생각을 담는 아티스트도 좋고, 칼 라커펠트처럼 내추럴본크리에이터도 좋습니다. 그렇지만 제 취향은 얼마전 소개한 안드레아 지텔(Andrea Zittel) 쪽입니다. 아름다운 작품으로 귀여운 무브먼트를 만드는 아티스트는 좋아하는 것에서 나아가 지지하게 됩니다. 



얼마 전 소개한 이스트 런던의 크라이시스 스카이 라이트 카페는 1967년에 캔 로치(Ken Loach) 감독의 영화 Cathy Come Home을 보고 충격을 받고 시작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생각을 담고 있는 예술 작품은 다른 이에게 영향을 주고, 영향을 받은 사람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행동을 취합니다. 켄 로치의 영화를 본 사람들은 어떻게 이런 재미없는 영화를 만드느냐고 하지만, 이것이 아티스트 켄 로치의 역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영화제가 사랑하는 감독이라고 불리겠죠. 


+ 찾기는 어려워도 금세 사랑에 빠져버리는 갤러리, 스톡홀름 마가신3에서 만난 안드레아 지텔
+ 이스트 런던의 사회적기업 카페, 크라이시스 스카이라이트 카페(crisis skylight cafe) 


알랭 드 보통의 신작을 읽고 독후감이나 써야지 하고 시작한 포스팅인데 결론은 '아티스트들 만세'로 끝나버렸습니다. 열심히 갤러리든 도서관이든을 찾으며 이 시대에 의미있는 작품을 남기는 아티스트들에게 감사합을 표해야겠습니다.

고맙습니다.




No comments:

Post a Com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