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p 19, 2011

[culture] 도시 정체성을 넘어서 산업이 된 베를린의 그래피티 (Berlin and Graffiti)

로모그래피에서 나온 <베를린 시티 가이드>는 이런 문장으로 시작됩니다.

"지금의 베를린은 마치 70년대의 런던, 80년대의 뉴욕과 같다. 여기는 자유의 공기로 가득하다. 그렇지만 이게 얼마나 지속될지는 아무도 모를 것이다."

베를린에서 3주 정도 지내고 나서 이 문장을 읽고는 '바로 이것!'이라며 저도 모르게 무릎을 탁 내리칠 뻔 했습니다. 지금의 베를린을 가장 잘 표현하는 문장을 발견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 문장에서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의 대다수는 가장 먼저 베를린의 그래피티를 떠올리지 않을까 합니다.

처음 이 도시에 와서 놀란 것은 '파리의 그래피티는 애교'라는 생각이 들만큼 스케일이나 수준이 스트릿 '아트'라고 말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라는 것이었습니다.




위의 두 사진이 주로 (베를린에서 찍은) 파리 스타일의 그래피티입니다. 물론 런던에서도 브뤼셀에서도 더블린에서도 지하철 역이나 외진 골목에서 이런 타이포 위주의 그래피티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파리 스타일이라고 한 건, 파리에서 가장 자주 볼 수 있었고 사람이 어떻게 올라갔지 싶을 만한 곳, 이를테면 5층 건물 높이의 외벽이나 고가 도로의 옆면이나 아랫면과 같은 곳에도 이런 그래피티가 그려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북역 근처에서는 런던이나 더블린에 비하면 아티스틱한 그래피티들을 보고 깜짝 놀라곤 했었습니다.

그런데 베를린은 일단 그 스타일이 다양합니다. 처음에는 벽을 캔버스 삼아 아티스트들이 그림 연습을 하나 싶은 순수한(?) 상상도 했었습니다.





그리고 용도도 다양합니다. 단순한 장식용부터, 안내판 역할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개인 블로그를 홍보하기도 합니다. 유리창에 그려진 그래피티는 스테인드 글라스 같기도 합니다. 







아래 사진의 이스트 사이드 갤러리(East Side Gallery)는 남아있는 베를린 장벽에 아티스트들에게 그림을 그리게 해서 하나의 거대한 전시 벽이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가장 좋아하는 베를린의 그래피티는 이제부터입니다.



숨은 카페와 재미있는 샵들이 많은 Kreuzburg의 Oranien Strasse 입구에서 발견한 베를린 전체에서 가장 인상적인 그래피티입니다. 멀리서 봐도, 가까이에서 봐도 압도적입니다.


베를린 북쪽의 Prenzlauer 지역의 마우어 벼룩시장이 서는 동네의 그래피티 입니다. 나이키에서 아티스트를 고용해서 그린 그림인가 싶기도 하지만, 가장 윗 부분에는 Welcome to Berlin이라고 써 준 센스에 미소짓고 말았습니다.


Jannowitzbrucke 역과 Ostbahnhof 사이 슈프레 강 건너편에 자리잡은 재미있는 공간, Kater Holzig의 한 쪽 벽면입니다. 날씨 좋은 날 강 건너에서 봤을 때에는 귀여웠는데, 비오는 오늘날 바로 앞에서 보니 좀 공포스럽더군요.


Friedrichshain과 Kreuzburg 사이의 Schlesische Strasse에 있는 재미있는 이 그림은 금 시계 겸 수갑을 찬 남자가 넥타이를 매고 있고, 오른쪽의 두 사람은 서로의 마스크를 벗기려 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제 멋대로 이름 없는 아티스트가 무언의 메시지를 남긴 그래피티라고 생각하고는 매우 감격했었는데, 알고보니 유명한 그래피티 아티스트 Blu의 작품이라고 합니다. 하긴 저 정도의 그림을 그릴 정도면 몇일 밤낮은 그렸어야 할테니 뱅크시 식의 게릴라 그래피티는 불가능 했겠죠.


Schlesische Tor 역에서 나오면 보이는 재미있는 그래피티 입니다. 일본 스타일의 일러스트같기도 한데 자세히 한참 들여다 보고 있으면 무언가 독특한 스토리가 튀어 나올 것 같습니다.


Prenzlauer Burg에서 Mitte로 걸어가다 발견했습니다. 저 글자들은 무슨 의미일까요? 창문도 없는 이 폐 건물에 왜 이런 그림을 그려 놓았을까요?


이렇게 베를린의 벽들은 그래피티로 가득합니다. 그들 스스로도 이 거리 그림들이 장사가 되고 있다는 것을 아는지, 다른 도시와 다르게 기념품 샵에 가면 베를린의 주요 관광지 엽서와 나란히 멋진 그래피티를 찍어 놓은 엽서들을 팔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베를린스럽다'고 느끼기 때문이겠죠.


스트릿 아트의 신화적 인물이라고 하면 될까요? 런던의 스트릿 아티스트 뱅크시(Banksy)도 미테 지역에 흔적을 남겼다고 하고, 어떤 이는 이런 베를린의 거리를 보고 'bombed city'라고 이름 붙여줬다고 합니다. 정말 거리를 걷다보면 스프레이 폭탄에 습격이라도 받은듯 합니다.

어제는 베를린에 사는 친구에게 그래피티는 불법이 아니냐고 물었더니, 자기가 받는 가장 많은 질문 중에 하나가 바로 이 질문이라며 준비된 듯한 대답을 들려주었습니다. 물론 불법이지만 시에서 강력하게 제지할 의지가 없는 것 같다는 것이 대답이었습니다. 베를린 시도 알겠죠? 이제 그래피티는 베를린의 상징이 되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는 없으니 Antigraffiti Task Force라는 것도 운영하고 있고요. 이거야 말로 전시 행정인가요?

궁금해져서 조금 더 찾아보니, 이제 베를린의 그래피티는 자유의 표현 혹은 정치적 슬로건 보다는 '산업'에 가깝다고 합니다. 만약 이 불법행위를 강력하게 제지하면 베를린 관광 산업뿐만 아니라 스프레이를 파는 로컬 샵들이 다 죽어 나갈 것이라는 재미있지만은 않은 글도 볼 수 있었습니다.

다시 로모그라피 베를린 시티 가이드의 첫 문장을 생각해 보면, 과거의 런던과 뉴욕같이 지금의 베를린도 언젠가는 다른 도시에게 그 역할을 내 줄 것입니다. 아티스트들이 모여 도시에 생기를 불어 넣고 그 생기를 찾는 사람들이 모여들면 돈도 따라 모여들테고, 그렇게 되면 가장 먼저 임대료가 비싸지고 생활 물가도 올라가겠죠.

요즘은 건물주들이 건물의 홍보를 위해서나 건물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그래피티 아티스트에게 돈을 주고 벽을 맡기기도 한답니다. 몇몇 그래피티 아티스트들은 손을 걷어 붙이고 그림을 팔고 있기도 하고요. 이렇게 비단 그래피티의 상업화만이 아니더라도 지금 이 도시가 커나가는 속도를 보면, 전 세계의 아티스트들이 베를린으로 모여드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싼 물가' 때문이라고 하는데 왠지 이럴 날도 오래가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베를리너들도 알고 있는지, 미테의 유명한 타헬레스(kunsthaus tacheles)의 한 쪽 벽면에는 이런 글귀가 쓰여져 있습니다. 불안함인지 체념인지 모르겠지만, 지금의 그들 그리고 베를린이 얼마나 갈 것인가에 대한 자문이 아닐까합니다.







2 comments:

  1. 수갑찬 남자 그래피티는 오보이 베를린 편에서 봤어요. 나머지는 처음보는데 언니의 정보력에 깜짝! 멋져요. 헤헤. 그래피티를 제지하면 스프레이 샵들이 죽어날 거라는 얘기는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겠네요.

    나중에 기회되면 베를린에도 오래 머무르고 싶어요. 물가가 많이 오르기 전에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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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응 베를린, 나도 너무 다시 머물고 싶은 도시야. 알면 알 수록 매력적인 도시! 물가 오르기 전에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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