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ul 31, 2011

[culture] 더블린 휴 레인 갤러리(Hugh Lane Gallery)의 숨은 히어로, 마크와 프란시스 베이컨






"안녕, 마크?" 이 친구(?)의 이름은 마크입니다. '푸딩 카메라'로 찍은 덕에 뽀얗게 나왔지만, 게다가 배경이 본의 아니게 명품 매장 앞이지만, 미안하게도 이 친구를 처음 봤을 때 저는 그가 노숙자라고 생각했습니다.


더블린의 휴 레인 갤러리(Hugh Lane Gallery) 로비였는데, 그는 하얀 비닐봉지에 알수 없는 소지품들을 채워 넣고 "여기 누구 가이드 투어 들을 사람들 있어?"라고 물었습니다. 가이드 투어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뭐... 기다리고 있긴 해"라고 말하면서도, 설마 그가 가이드 투어를 이끌 가이드일 줄은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을 겁니다.


희뿌연 안경은 사고 나서 한 번도 닦지 않은 것 같았고, 머리에 있는 핏자국은 그의 손톱에도 같은 색의 무언가가 있는 것으로 보아 열심히 긁어서 생긴 상처로 추정됐고, 아주 오랫동안 씻지 않은게 분명해서 생긴 악취에 가까운 체취 때문에 그가 이동할 때마다 투어의 무리는 홍해처럼 갈라져야 했습니다.


하지만 반전이 있었습니다. 그의 가이드는 정말이지 fantastic 했습니다. 그림 하나를 설명해도, 이 작품이 휴 레인 갤러리에 걸리게 된 경로와 아일랜드 미술사에서 갖는 의미, 영향을 준 다른 작가의 그림으로 자연스럽게 연결해서 루트를 짠 세심함까지 보였다면 놀랄만 하지 않나요? 


투어가 끝나고 전문가의 포스가 느껴지는 한 할머니는 그에게 "네 이야기는 내가 들어본 그 어떤 가이드보다 훌륭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감격을 더 많은 사람과 나누고 싶으셨는지 유일한 동양인이었던 제게 다가오셔서는 그의 말을 다 알아들었냐며 정말 훌륭했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할머니에게 완전히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가 남다른 건 느낄 수 있었다고 말하는 사이, 아쉽게도 마크는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반전이 있었습니다. 그날 오후 더블린의 가장 번화가라는 Grafton street을 걷다가 그를 우연히 만났고 우리는 서로를 알아봤습니다. 그가 같은 차림에 같은 봉지를 들고 있지 않았더라도 저는 그를 알아봤을 테고, 그는 열심히 자기 이야기에 귀 기울이던 제가 인상적이었던 모양입니다. 


알고보니 그는 "박사 학위는 없어"라고 말하는 겸손한 미술사 학도였습니다. 대학에서 미술사로 석사까지 마치고 더블린 주요 갤러리에서 가이드 투어를 이끌고 있다고 합니다. 자원봉사냐고 물어보니 그렇지는 않은데 페이가 짜다며 잠깐 인상을 찌뿌렸습니다. 그리고는 금세 얼굴을 바꾸어 제게 더블린의 멋진 갤러리들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그 중 임마(IMMA, Irish Museum of Modern Art)는 휴 레인 갤러리와 더불어 더블린에서 가장 멋진 갤러리로 기억됩니다.


양해를 구하고 사진을 한 컷 찍은 후에 찍은 사진을 보여주려 했더니, 손사래를 치며 안 봐도 된다고 하고 다시 어딘가로 사라졌습니다. 원래 묻고 싶었던 연락처를 물어보지도 못했는데 말이죠. 그래서 휴 레인 갤러리에 그의 연락처를 알 수 있을까 하는 이메일을 보냈는데, 답이 없습니다.


누군가 아일랜드에 갈 일이 있다면, 휴 레인 갤러리에서 있는 일요일 2시 가이드 투어를 권합니다. 아무리 행색이 누추하고 고약한 체취를 풍기는 남자가 나타나더라도 마음을 활짝 열고 그의 말에 귀를 기울여 보세요.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지 말라는 옛말이 떠오르고, 인간적인 매력이 그 어떤 것도 이길 수 있다는 말의 의미를 되새기게 됩니다. 




휴 레인 갤러리 이야기를 조금 더 해야겠네요. 


여러 나라의 갤러리를 다니다 보면 국가나 시 정부에서 운영하는 갤러리가 아님에도 상당한 컬렉션을 자랑하는 갤러리들이 있습니다. 런던의 테이트 모던이나 사치 갤러리가 그렇고, 아직 못 가봤지만 뉴욕의 구겐하임 미술관도 엄청나다고 합니다. 이들의 공통점이라면 각각 헨리 테이트(Henry Tate), 찰스 사치(Charles Saatchi), 페기 구겐하임(Peggy Guggenheim)의 이름을 딴 갤러리들이고 이들은 모두 세기의 아트 컬렉터로 꼽히는 사람들입니다. 


헨리 테이트는 설탕 회사로 막대한 돈을 벌어서, 찰스 사치는 광고 회사의 성공으로, 페기 구겐하임은 유산으로 얻은 재산으로 그림을 모으기 시작합니다. 그림을 모으고 모아 테이트는 그것을 나라에 기증하며 영국에 4개의 테이트 갤러리를 세웠고, 사치는 그림을 모으며 신진 작가를 양성하고 있고, 구겐하임은 아티스트들과 연애도 하고 후원도 했습니다. 


휴 레인 역시 아트 컬렉터이자 딜러로 20세기 초반 유럽에서 가장 왕성하게 그림을 사고, 팔고, 모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휴 레인이 태어나기는 아일랜드에서 태어났지만 활동은 영국을 중심으로 했고, 그의 유언장에는 유산을 영국에 남긴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일랜드와 영국 간에 그의 엄청난 유산(피카소, 마네, 드가, 르누아르 등 인상파 화가들의 상당한 작품들)을 두고 갈등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결국 최근에 많은 부분 아일랜드로 넘어왔고, 그 작품들이 바로 여기 휴 레인 갤러리에 전시되고 있습니다. 그가 살아 생전 상당한 작품을 이미 영국에 기증했기에 테이트의 갤러리들과 같은 대규모는 아닙니다. 굉장히 아담한 규모지만 알차다고 할까요. 유명한 인상파 화가들의 작품들은 적어도 한 두 점씩은 모두 있고, 아일랜드 현대 미술의 대표 작가들의 그림도 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저에게는 '일그러진 얼굴을 그리는 화가'로 기억되는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의 작업실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베이컨이 영국 출신인 줄 알았는데 더블린에서 태어났다고 합니다. 부모님도 영국인이었고 영국에서 주로 활동을 했지만, 출생지가 더블린이다보니 더블린 사람들의 베이컨 사랑은 남다른 것 같습니다. 어느 갤러리를 가도 그의 작품 엽서는 꼭 있기 마련입니다.


이런 걸 두고 세렌디피티라고 하나요? 얼마 전 '프란시스 베이컨은 살아 생전 그의 작업실을 단 한 번도 청소하지 않았다'라는 말을 듣고 '뭐 그런 사람이 다 있어'라며 그를 두고 수다를 떤 적이 있는데, 정말 그의 작업실을 여기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원래 런던 사우스 켄징턴에 있던 스튜디오가 그의 상속자의 기증으로 이곳으로 옮겨졌다고 합니다. 


유명한 동성애자였던 그에게는 유산을 물려줄 가족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유산은 친구(연인이었는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만)인 존 에드워즈(Jone Edwards)에게 남겨졌는데, 그는 베이컨의 스튜디오가 있어야 할 곳은 바로 더블린이라고 했다는군요. 스튜디오는 상상대로 무척 더러웠습니다. 아래 사진은 깨끗하게 나온 편입니다.





베이컨의 스튜디오 방에는 그가 왜 이런 환경에서 작업을 했는지에 대한 다큐멘터리와 어록들, 그리고 그의 작품들을 볼 수 있는 디지털 갤러리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는 이런 카오스가 자신에게 영감을 준다고 말합니다. 

“I feel at home here in this chaos because chaos suggests images to me.” - Bacon


더블린에서 기대한 건 중학교 때 좋아하던 밴드 크랜베리스와 기네스 맥주, 그리고 런던보다 더하다는 변덕스러운 날씨 정도였습니다. 사실 커다란 기대 없이 어려서부터 막연히 가 보고 싶은 도시였기 때문에 왔다고 밖에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더블린에서 주로 하고 있는 건, 숨은 갤러리들을 돌아보는 일이 됐습니다. 


영국의 소도시 중 최근 개발의 바람이 분 도시에 온듯한 인상을 주는 더블린은 특색이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래서인지 발견의 묘를 느끼게 하는 도시입니다. 오늘은 마크와 베이컨을 발견한 덕분에 더블린의 추적추적 음산한 날씨가 용서됩니다. 






2 comments:

  1. 더블린의 변덕스러운 날씨가 여기서도 느껴지네. ㅎㅎ 잘 읽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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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응응 난 여행다니면서 인간에게 날씨가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깨달았어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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